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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 이야기

아몬드 - 한 가지 질문에도 백 가지 다른 답이 있는 게 이 세상이란다.

by 얼룩말책방 2021. 12. 5.

# 아몬드_손원평



# 첫 문장 - 그날 한 명이 다치고 여섯 명이 죽었다.



38p 사실 나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내가 미세한 단어의 차이를 감지하지 못하는 것처럼, 내가 정상인지 아닌지 따위는 내게 아무 영향도 미칠 수 없었다.

50p 영화나 드라마 혹은 만화 속의 세계는 너무나 구체적이어서 더 이상 내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 그 세계에 내가 변화시킬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책은 달랐다. 책에는 빈 공간이 많기 때문이다. 단어 사이도 비어 있고 줄과 줄 사이도 비어 있다. 나는 그 안에 들어가 앉거나 걷거나 내 생각을 적을 수도 있다. 의미를 몰라도 상관없다. 아무 페이지나 펼치면 일단 반쯤 성공이다.

51p 뭐든 여러 번 반복하면 의미가 없어지는 거야. 처음엔 발전하는 것처럼 보이고 조금 더 지난 뒤엔 변하거나 퇴색되는 것처럼 보이지. 그러다 결국 의미가 사라져 버린단다.

90p 부모는 자식에게 많은 걸 바란단다. 그러다 안 되면 평범함을 바라지. 그게 기본적인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말이다. 평범하다는 건 사실 가장 이루기 어려운 가치란다.

150p 말로 하긴 힘든데... 그러니까, 브룩 실즈는 젊었을 때 알고 있었을까? 늙을 거라는 거. 늙는단 거, 변한다는 거, 알고는 있어도 잘 상상하진 못하잖아.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 어쩌면 지금 길 가다 보는 이상한 사람들, 그러니까 뭐 지하철 안에서 혼자 중얼대는 노숙자 아줌마라든가, 무슨 일을 겪은 건지 다리가 양쪽 다 없어서 배로 땅을 밀면서 구걸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도 젊었을 때는 전혀 다른 모습일 수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

160p 음, 글쎄. 아몬드를 먹는 대신 자극을 주는 건 조금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뇌라는 놈은 생각보다 멍청하거든. 편도체가 작게 태어났지만 노력을 통해 가짜 감정이라도 자꾸자꾸 만들다 보면 뇌가 그걸 진짜 감정으로 인식할지도 모른다는 게 심 박사의 말이었다.

161p 몰랐던 감정들을 이해하게 되는 게 꼭 좋기만 한 일은 아니란다. 감정이란 참 얄궂은 거거든. 세상이 네가 알던 것과 완전히 달라 보일 거다. 너를 둘러싼 아주 작은 것들까지도 모두 날카로운 무기로 느껴질 수도 있고, 별거 아닌 표정이나 말이 가시처럼 아프게 다가오기도 하지. 길가의 돌멩이를 보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대신 상처 받을 일도 없잖니. 사람들이 자신을 차고 있다는 것도 모르니까. 하지만 자신이 하루에도 수십 번 차이고 밟히고 굴러다니고 깨진다는 걸 '알게 되면' 돌멩이의 '기분'은 어떨까?

164p 한 가지 질문에도 백 가지 다른 답이 있는 게 이 세상이란다. 그러니 내가 정확한 답을 주기는 어렵지. 특히 네 나이 땐 세상이 더 수수께끼 같을 거다. 스스로 답을 찾아야 되는 때거든. 그래도 굳이 조언을 원한다면, 질문으로 대신하마. 그 애가 너한테 제일 많이 한 행동이 뭐지?

171p 나는 운명이 주사위 놀이를 하는 거라고 말해 주려다가 그만뒀다. 그거야말로 책에서 읽은 구절에 지나지 않았다.

172p 궛가를 떠돌던 엄마의 목소리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곧 엄마의 목소리를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내가 알던 모든 게 내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245p 멀면 먼 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외면하고,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공포와 두려움이 너무 크다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껴도 행동하지 않았고 공감한다면서 쉽게 잊었다. 내가 이해하는 한, 그건 진짜가 아니었다.

259p 사실 어떤 이야기가 비극인지 희극인지는 당신도 나도 누구도, 영원히 말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딱 나누는 것 따윈 애초에 불가능한 건지도 모른다. 삶은 여러 맛을 지닌 채 그저 흘러간다. 나는 부딪혀 보기로 했다. 언제나 그랬듯 삶이 내게 오는 만큼. 그리고 내가 느낄 수 있는 딱 그만큼을.

262p 아낌없는 사랑으로 결핍 없는 내면을 선물해 주신 부모님과 가족들에게 감사한다. 한때는 내적으로 부족함 없이 자라난 것이 작가가 될 깜냥이 못 되는 거라 생각해 부끄러웠던 시절도 있다. 세월을 거치면서 그 생각은 바뀌었다. 평탄한 성장기 속에서 받은 응원과 사랑, 무조건적인 지지가 몹시 드물고 귀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다. 그것이 한 인간에게 얼마나 큰 무기가 되는지, 세상을 겁 없이 다양하게 바라볼 수 있는 힘을 주는지, 부모가 되고서야 깨닫는다. [작가의 말]



책 표지의 낡음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거쳐 갔는지 알 수 있는 표식이자, 내 호기심이 커지는 이유이기도 했다.
다섯 달 동안 책을 가까이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다만 내 삶의 사이드에 있었던 것은 맞다.
변화 속에서 일상을 찾는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 책을 통해 나의 일상을 되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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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몬드'는 독자가 생각할 수 있는 여백이 참으로 많았다. 그리고 내 상상을 뛰어넘었다. 작가가 뛰어넘은 그 지점은 나로 하여금 '아!' 이 탄식(?)으로 감탄하게 했다.
그래서 오늘 서평은 나의 '탄식(?), 감탄 지점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스포'가 될 수도 있다.

1. 아몬드의 의미
아몬드의 뜻을 우리가 먹는 견과류라고 생각했다. 표지의 색깔에서도 그렇듯, 먹는 아몬드를 연상하게 했다. 물론 중의적인 의미가 포함되겠지만, 여기서의 아몬드는 편도체의 모양이 아몬드와 비슷한 것. 즉, 편도체를 뜻했다. 윤재가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가 다른 사람보다 작은 편도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의사들이 내린 진단은 감정 표현 불능증(알렉시티미아)였다.

2. 슈퍼마켓 아들의 죽음
어느 날 윤재가 어린 남자아이가 맞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근처 슈퍼마켓으로 가 주인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TV 속 예능을 보고 있던 아저씨의 무덤덤하면서도 귀찮아하는 태도. 그리고 그 피해자가 자신의 아들임을 알게 되면서 겪는 극심한 분노와 고통. 이 두 감정의 대비가 극명해서 너무 놀랐던 지점이다.
나 역시 아저씨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었다. 방관과 분노의 경계. 다른 부류의 단어인 것 같지만, 여기에서는 가장 가까운 양면의 조합이었다.

3. 할머니, 엄마의 비극적인 운명
행복한 순간에 찾아오는 슬픔과 고통은 잔인하다. 윤재는 느낄 수 없었지만, 독자들은 윤재를 대신해서 느낄 수 있었다. 화남과 분노, 좌절과 고통, 막막함, 슬픔.

4. 윤 교수, 곤이와의 관계 및 만남
윤 교수와 곤이는 부자관계이다. 윤 교수 부인이 놀이동산에서 곤이를 잃어버린 뒤, 윤 교수는 자식을 찾으며 고통 속에서 살게 된다. 곤이는 어린 시절, 중국 노부부, 입양 및 파양, 복지 시설, 소년원을 거치면서 거칠고 막 나가는 중학생으로 성장한다. 결국 윤 교수는 곤이를 찾게 되지만, 자신이 상상한 아들의 모습과의 괴리감에 이 둘은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관계가 된다.
윤재는 이 가족의 스토리에 엮이게 되면서 곤이의 괴롭힘을 받게 된다.

5. 심 박사의 역할
심 박사는 윤재 네 책방 건물의 주인이자, 빵집 아저씨다. 처음 윤재와의 만남 자체도 어색하지 않았다. 윤재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인정하고 도움을 주는 따뜻한 어른이다. 이 분 덕분에 윤재의 삶에서 사라진 가족의 결핍이 크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참으로 감사한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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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설 속 여러 등장인물들과 깊게 공감하였다. 그리고 나를 이들에게 투영하였다.
이 세상에서 홀로 험난한 세상을 살게 된 곤이가 되었다가,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살다가 자식을 잃어버리고,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윤 교수도 되었다. 똑똑하고 예쁜 여대생이 사랑에 빠져 좌판 액세서리를 파는 남자와 결혼한 윤재 엄마가 되었다가, 자식을 키우며 본인을 희생하고 자식의 성공이 삶의 전부가 되는 윤재 할머니도 되었다.

이렇게 다양한 인물들과 교감하면서 글을 읽다 보니, 이 세상 히스토리의 끝에 과연 희극은 존재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과정 속에 행복과 기쁨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고통과 슬픔, 아픔은 왜 더 무거운 것일까?
그 크기를 줄여나가는 것이 인생인 것일까?

윤재는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살고 있을까?

이제 윤재가 사는 세상에는 그 감정들과 함께 하고 있을 것 같다. 자신의 목적과 의미를 가지고 말이다.